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빅토리아 멜리타 (문단 편집) === 결혼 === 이후 빅토리아는 집안으로부터 고종사촌인 [[에른스트 루트비히|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 일에는 언니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마리]]와 관련된 뒷사정이 있었다. 훗날 [[조지 5세]]가 되는 웨일스의 공자 조지는 마리를 사랑해 그녀와 결혼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지의 아버지이자 당시 웨일스 공이었던 [[에드워드 7세]], 마리의 아버지이자 당시 에든버러 공작이었던 [[알프레드 어니스트 앨버트|알프레드]], 조지와 마리의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조지의 어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웨일스 공비 알렉산드라]]와 마리의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마리야는 동서지간인 알렉산드라와[* 마리야는 자신이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이자 러시아의 여대공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컸다. 이 때문에 겨우 덴마크의 공주인 알렉산드라가 자신의 손윗동서라는 사실에 불만을 가졌다.] 시가인 [[영국]]을 싫어했기 때문에, 딸을 자신처럼 영국의 왕족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결혼은 무산되고 마리는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 1세]]와 결혼했다. 후손의 혼사에 관여하는 걸 좋아하는 빅토리아 여왕은 뜻대로 되지 않은 손녀의 결혼에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다음 차례인 빅토리아 멜리타의 결혼은 빅토리아 여왕의 뜻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딸 [[앨리스 모드 메리|앨리스]]의 아들인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아들 [[알프레드 어니스트 앨버트|알프레드]]의 딸 빅토리아의 결합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며 결혼을 밀어붙였다. 에른스트와 빅토리아는 서로에게 관심은 없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1894년 4월 19일, 빅토리아 멜리타와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코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63601531735.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66192112554.jpg|width=100%]]}}} || || 빅토리아 멜리타와 딸 엘리자베트 || 둘은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에른스트는 헤센의 대공으로서의 의무를 우선시했고 빅토리아는 자신에게 더 다정한 남편을 원했다. 빅토리아는 1895년에 딸 엘리자베트를 낳았지만 부부의 사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부부는 각각 하나뿐인 딸을 매우 사랑했다. 특히 에른스트의 딸 사랑은 유명했는데, 그는 외동딸에게 모든 애정을 퍼부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날이 갈수록 엄마를 빼닮아 갔지만, 에른스트는 아내에게는 무심한 반면에 딸을 너무나 사랑했다. 결국 가정은 부부가 서로에게 냉담하면서 딸의 애정을 경쟁하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에른스트와 빅토리아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싸움이 오가곤 했다. 부부싸움이 일어나면 빅토리아는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졌다. 또한 당시 소문에 의하면 외출하고 돌아온 빅토리아가 에른스트와 남자 하인이 동침(!)하는 걸 목격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빅토리아는 이런 상태를 참을 수 없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맺어준 혼인을 깰 수 없었기 때문에 이혼은 불가능했다. 결국 1901년, 빅토리아 여왕 사후에서야 빅토리아는 집을 나왔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빅토리아는 이혼 후 코부르크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빅토리아 에른스트 부부는 딸 엘리자베트의 양육을 각각 반 년씩 맡기로 했다. 이 이혼은 유럽 왕실에 굉장한 스캔들이었고 빅토리아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오직 전 남편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그의 누나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빅토리아]]만이 이혼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딸 엘리자베트마저 어머니를 원망했는데,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한 번은 엘리자베트가 어머니 빅토리아의 집으로 가는 날에 사라지는 소동이 발생했다. 숨어있는 딸을 발견한 에른스트는 왜 숨었는지 물었다. 이에 엘리자베트는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아빠는 절 사랑하는 걸 보여주시잖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Michael John Sullivan, A Fatal Passion: The Story of the Uncrowned Last Empress of Russia, Random House, 1997, p.217-218] 1903년에 엘리자베트는 8살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빅토리아는 깊은 슬픔에 빠져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딸이 죽은 후 빅토리아는 사촌인 러시아의 키릴 대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길 원했지만 키릴의 사촌이자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러시아 황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촌 간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니콜라이 2세]]의 아내 [[헤센의 알릭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빅토리아의 전 시누이(전남편 에른스트의 여동생)였던 게 결정적이었다. 알렉산드라의 입장에서는 오빠와 이혼한 전 올케가 자기 남편의 사촌과 재혼하는 거였기 때문에, 빅토리아와 키릴의 혼인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1905년에 키릴은 [[러일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결혼이었기에 키릴은 황실에서 쫓겨나 [[파리(프랑스)|파리]]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빅토리아는 두 딸인 마리야와 키라를 낳았다. 얼마 후 키릴의 사촌 [[니콜라이 2세]]는 키릴을 복권시켰고,[* 이는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알렉세이]]는 [[혈우병]] 환자여서 [[요절|일찍 죽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고 2순위 계승권자인 니콜라이 2세의 동생 미하일 대공은 귀천상혼을 한 탓에 자손들의 황위 계승권이 없어서, 계승법이 변경되지 않는다면 계승서열이 그 다음 순서였던 키릴 대공과 그 자손이 황위를 이어야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빅토리아도 러시아 황실의 인정을 받아 정식으로 대공비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